▲ 현대인들은 수많은 정보로 인해 질식당하고 무한경쟁으로 인간성이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PIXA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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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정보화 ‘무한 경쟁시대’
흔히 현대를 정보화시대,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한시도 쉴 틈 없이 정보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지고, 사람들은 앞 다퉈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습득·활용하기 위해 혈안이다.
또한 적은 시간에 수행해야 할 산적한 일들에 대한 염려 등의 외적인 힘에 의해 너무도 강력하게 빈번히 영향을 받는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정보로 인해 질식당하고 무한경쟁으로 인간성이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글로벌 현대인들은 치열한 무한경쟁 속에서 오직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24시간 발버둥을 친다.
▲ 글로벌 현대인들은 치열한 무한경쟁 속에서 오직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24시간 발버둥을 친다. PIXAB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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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각고 끝에 얻는 결과물들은 진정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돈을 좇은 것에 혈안이 되고, 명예에 집착하고, 권력에 탐닉하고, 지식과 섹스에 온갖 정신을 다 빼앗기고, 이데올로기에 광분하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인생의 ‘삶이 선물’이라고? “나에게 삶은 저주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다. 대표적인 것만 알아보면, 경제적 빈곤, 정신적 고통과 고독, 스트레스와 좌절, 상해와 질병, 노화와 죽음을 들 수 있다.
▲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다. 대표적인 것만 알아보면, 경제적 빈곤, 정신적 고통과 고독, 스트레스와 좌절, 상해와 질병, 노화와 죽음을 들 수 있다.PIXA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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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재산과 명예가 있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고독과 절망뿐이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성공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들이 많고, 슬퍼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나의 자아를 찾겠다고 젊은이들은 독신으로 살려고 하고, 중년과 노년 부부들은 그동안 상실된 나를 발견하겠다며 이혼도 감행한다.
여기에서 세계 최고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노벨문학상 수상자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둘 다 비극적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최고의 인기 배우였다. 전 세계 남성의 우상이었다. 마릴린 먼로는 이런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다우며,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그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생을 마감했다.
▲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최고의 인기 배우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생을 마감했다. PIXA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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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은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역작이다. PIXA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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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은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역작이다. 이 책에는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바다에서 많은 날들을 기다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 그래서 노인은 그 거대 물고기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건져보니 오직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상어 떼들이 습격하여 물고기를 다 뜯어먹어 버렸던 것이다. 노인은 심한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헛된 목표를 놓고 질주하는 우리네 인간들의 허무한 삶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일생을 바쳐 헌신한 일의 결과는 앙상한 물고기의 뼈와 같이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더러 허무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직장과 사업터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지만 그 결과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오히려 실망과 불만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까뮈’의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메시지에 응축된다. PIXABAY.COM photo sour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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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것’
19세기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절망적으로 대답했다.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까뮈’의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메시지에 응축된다. 실존주의자들의 대답을 간추리면 “인간은 죄의 고통과 허무와 무의미,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절망적인 존재”라는 귀결에 이른다.
이미 바이블의 구약과 신약에서는 피조물 ‘인간의 허무’를 구체적이며 직선적으로 과감하게 묘사한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편 89:47) 또 온갖 부귀영화를 향유한 솔로몬 왕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라는 결론을 맺는다.
▲ 전도서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향유한 솔로몬 왕은 인생을 ‘모든 것이 헛되다’ 라는 결론을 맺는다. myjewishlearni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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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주제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1-10장까지의 주제는 “모든 것이 헛되다”(1:2)라는 것이다. 그리고 11장 이후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12:1)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주제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필히 인지하며, 즉시해야 한다.
또한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고 언급하고 있고, 베드로전서에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베드로전서 1:24) 라고 단언한다.
● 양심 회복! ‘행복과 안식의 근간’
세상에는 참으로 문제 투성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도덕, 환경 등 문제없는 데가 없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변화되기 전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는가? 인간의 본질을 깨달아 참된 인생의 목적을 향해 가야 한다. 인간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양심(良心)을 회복하는 것이다. 모든 죄악의 근원은 양심을 저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양심은 곧 정직(正直)과 진실(眞實)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무신론은 양심의 활동을 억제한다. 그래서 무자비한 결과를 가져온다. 무신론이 넘실거리는 곳에는 자비와 폭력이 횡횡한다. 그동안 무신론의 전진기지 공산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국은 망하고야 만다.
▲ 경제도 도덕적인 사회가 기반이 되지 않고는 제대로 발전이 될 수 없다는 노벨 경제학상을 탄 영국의 ‘프레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adamsmith.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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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도덕적인 사회가 기반이 되지 않고는 제대로 발전이 될 수 없다는 노벨 경제학상을 탄 영국의 ‘프레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양심의 회복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근본적 지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본성과 양심의 지시를 따르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양심 파동의 생존 여부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죄책감이다.
죄책감을 의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백미인 ‘자기수용’(self-acceptance)의 핵심적 기본적인 조건이다. 죄책감을 감지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실존을 솔직담백 인정하는 ‘자기수용’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양심을 삶의 준거로 삼고 있다. 양심이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언행과 행실에 대해 심한 가책을 느끼며 몹시 괴로워한다. 또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보면 상대방의 양심을 질타한다. “양심에 찔리지 않느냐?”, “양심은 있을 것 아니냐!”, “양심대로 살아라.” 등등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 죄책감을 의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백미인 ‘자기수용’(self-acceptance)의 핵심적 기본적인 조건이다. crosswalk.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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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양심의 회복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뒤로하고 본질적인 삶을 위해 스스로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겸손함과 적극성이 있을 때 구현되게 된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며, 우리의 모든 약함과 상처를 알고 긍휼과 희망을 갖고 다가오는 창조주(구세주)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치료자이시며 구속자이시고 회복자이시다. 이제는 양심에 기초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삶에 행복이 넘치고, 평화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기적이 이뤄진다.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근거되는 온전한 양심은 ‘고뇌, 슬픔, 죄책감, 수치심’ 등의 죄책감으로부터의 온전하게 해방되면서부터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something to do), 두 번째로,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someone to love), 세 번째로, ‘뭔가 바라고, 기대할 것’(something to hope for)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때만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hearthym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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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룰 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속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행복이 있는데, 이 행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아무도 뺏어가지 못한다. 이 행복 속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부나 안락에 있지 않고, 인간적인 영예나 권력에도 있지 않으며, 제아무리 유용해도 과학이나 기술, 예술 등 인간 업적에도 있지 않으며, 어떤 피조물 안에도 있지 않고 오로지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예수님)께만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때만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진실로 깨달으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하게 된다. 참된 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는 악한 본능을 정화하고, 무엇보다 우선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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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