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답보상태
‘자동차 급발진’(Sudden Unintended Acceleration, SUA)은 자동차가 운전자의 제어를 벗어나 의지와 관계없이 가속되는 현상이다. 급발진은 정지상태나 저속상태, 정속 주행상태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으며, 제동장치의 작동 불능을 수반한다. 따라서 자동차 급발진은 대형 사고로 이어져 사망률과 위험도가 크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5년 50건, 2016년 57건, 2017년 58건, 2018년 39건, 2019년 33건, 2020년 25건, 2021년 39건, 2022년 15건 등 매년 약 40여건 내외의 국내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일명 ‘도현이 법’은 지난해 ‘급발진’ 의심 사고로 희생된 12살 이도현 군의 사망을 계기로, 자동차 제조사가 더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하도록 발의된 법안이다. 2022년 12월 강릉시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일어난 사고가 법안 제정의 발단이 됐다. 운전자였던 할머니는 크게 다쳤고, 함께 타고 있던 손자 도현군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고 직후 유가족은 차량 전문가를 찾아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도현군의 부친은 지난 2월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하는 법 개정 청원을 냈고, 6일 만에 국민 동의 요건 5만 명을 돌파했다. 부친 이 씨는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도 진행 중이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6월 22일 국회에서 법안심사 제2소위원회를 열고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심사했다. 이 법안은 올 4월 소위원회 안건으로 올라왔었으나 심사는 이뤄지지 못해 이날이 사실상 첫 심사다.
지난 6일 1일에도 법원은 또 다른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1심은 물론, 항소심 재판부도 이날 “유족이 제시한 감정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차량 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올해 8월 5일에는 경남 창원시 석전사거리에서 2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됐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마지막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CCTV 영상은 전기차 택시가 마치 로켓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맞은편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시내버스 측면을 그대로 들이받고 바로 화재가 발생하며 시내버스는 그 충격으로 90도 회전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지난 2020년에는 서울 한 대학교에서 승용차로 경비원을 치어 숨지게 한 운전자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사고를 낸 운전자는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엔진 소리가 커지고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라며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을 주장했다. 법원은 “피해자를 피하려고 방향을 튼 점, 여러 차례 브레이크 등이 점등된 점 등으로 볼 때 차량 결함을 의심하기 충분하다”라고 판시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의 결함 여부를 규명하는 주체가 제조사라는 점을 명시한 것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산업계는 해당 법안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영업비밀 유출이 우려되며 소송남발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역시 “소비자 입증책임 완화는 불필요한 분쟁과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고 했다.
● 자동차 제조업체 ‘원인규명 책임’
현재 급발진 조사는 ‘사고기록장치’인 EDR(Event Data Recorder)에 의존하고 있다. EDR은 자동차의 사고 전·후 일정 시간 동안 자동차의 운행 정보를 저장하고 저장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이다. EDR 기록정보는 자동차에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졌을 때, 차량 속도, 엔진 회전수, 제동페달 작동 여부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차종 혹은 제작사에 따라 더 구체적인 정보들이 저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급발진 사례가 한 건도 인정되지 않으며 EDR 분석의 신뢰성에 물음표가 붙고 있다.
특히 급발진사고는 ‘전자제어유닛’(Electronic Control Unit)의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개를 거부하는 영업비밀인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를 자동차 제조사로부터 제공 받는다 해도 이를 분석해서 결함을 찾아내는 데는 1~2년이 소요될 뿐 아니라 막대한 비용은 소비자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국회에는 국민의힘 정우택·더불어민주당 박용진·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안 법안이 계류 중이다. 세 법안 모두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면 사고 원인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고, 손해 배상책임에 대한 입증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자동차 제조업자에게 돌리는 것이 주 내용이다.
현행법상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 책임은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기계 결함을 입증하고 자동차 제조업체에 손해배상책임을 물어야 한다. 특히 자동차 급발진이 의심되는 교통사고 발생시 자동차의 결함과 사고발생 간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규명은 자동차제조사가 보유하고 있는 핵심 정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비전문가인 소비자가 첨단 기술이 집적된 자동차 결함을 밝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내에서 자동차 결함 의심으로 제기된 소송에서 기업이 패소한 사례는 사실상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재까지도 한국에선 법원이 급발진을 인정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1심에서 자동차의 결함이 인정되더라도 2심이나 3심에서 뒤집히기 일쑤다.
지난 13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가 766건이나 발생했지만,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이 올 3월 23일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연도별 국내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22년까지 누적 신고건수는 766건에 달했다. 그러나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전무한 실정이다.
● 급발진 원인 ‘조사방식 다변화’
유럽의 경우, ‘피해자에게 손해를 야기한 것으로 의심되는 제조업자 등의 사실· 증거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제조업자 등이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관련 증거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 인과관계를 추정’하도록 하는 ‘제조물책임지침 개정(안)’을 채택한 바 있다.
2013년 10월 24일 미국 오클라호마주(州) 1심 법원은 2007년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로 숨진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에게 300만 달러(약 38억9800만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도요타 세단 ‘캠리’ 차량이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며 장벽에 충돌해 운전자가 중상을 입고 동승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법원이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업체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최근 차량 급가속으로 인한 충돌사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객관적 원인 규명을 위해 모든 차량에 사고기록장치(EDR·Event Data Recorder) 부착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는 EDR 장착이 의무화돼 있지 않은데다, 일부 차종에 설치된 EDR은 경찰도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장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 5월 7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현행 법·제도의 문제점, 해외 입법 사례, 바람직한 입증 책임 분배 방안, 제조물 범위 확대 필요성, 결함 추정 규정의 개선 필요성” 등을 검토하는 제조물 책임법 운용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고 밝혔다.
급발진사고에서 결함에 대한 입증 책임을 자동차 제조사로 전환시켜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라는 도현이 법이 올해 안에 신속하게 제정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급발진 원인 규명을 위해 조사방식을 다변화하고 향후 지속적인 연구와 실험 등 적극적인 조치와 제도개선 등을 통해 국민의 의구심과 불안감을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원본 기사 보기:
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