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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6.25 [02:01]
민간 외교사절 ‘한국과 독일 가교역’ 자임
<스페셜> 반세기전 이국땅에 일군 ‘임정희 여사’의 육필일기
 
임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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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남편과 필자. 자녀들 사돈들과 함깨 

 

 

어언 반세기전 독일의 간호사로 파견되어 이국땅에서 새롭게 제2의 삶을 알차게 일군 임정희여사는 이제 현역에서 은퇴하여 지난 날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면서 생생히 회고하고 있다. 본지는 과거 한국의 어려웠던 시절부터 이국땅에서 고뇌와 집념의 진통속에서 전문인의 삶을 일구어낸 휴먼 스토리를 입수하여 자서전적 고백담을 독자들과 조우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1970년 무안중 수석졸업, 언니의 권고로 독일행 결정

 

71년 첫 도착한 본 대학병원 외과와 이비인후과 근무

 

 

1972년 첫 남편인 하인즈 담씨 독일생활 적응 큰 도움

 

1981년 독일국적을 취득, 영어실력 향상에도 주경야독

 

 

독일만의 독특한 제도, 교회 간호사로 새로운 변신시도

 

심신을 다루는 치료병원라인클리닉에서 2016년 퇴직

 

 

교회합창단 봉사활동과 만돌린 연주 손주 돌보기 새삶

 

모국을 늘 그리워하며, 전문역량 양국간 가교역활 소임

 

 

 

▲ 망중한! 남편 하트뭍과 손자들과 함께    


 

장학생에도 독일행 결정후 고교진학 포기

 

현재 독일의 수도 본에 거주하고 있는 저 임정희(독일 이름: Frau Jung-Hee Kühn)19521220일 임상길씨와 김귀례씨의 둘째 딸로 전남 무안군 일로면 산정리 2구 학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602월부터 19662월까지 쌍둥이 동생 영희와 함께 일로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동광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습니다. 동생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중학교에 들어갔고 나는 간발의 점수 차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집에서 1년을 쉬면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 장학생이 못된 것도 억울했지만 경제적 형편상 중학진학을 막으시던 부모님도 이해는 되지만 원망스러웠습니다. 나는 그 때부터 밤마다 진학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 쉬는 1년 동안 장학생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19672월에는 무안중학교 우수 장학생으로 선출되어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1970116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1년 반 전 독일에 간 친 언니의 권고로 독일행을 결정한 뒤 고등학교를 포기했습니다.

 

1970320일에 목포 간호조무사 양성소에 입학하여 다음해인 1971317일까지 12개월 동안 독일에 가는 꿈을 꾸며 간호조무사 공부를 마쳤습니다.

 

1971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은 목포 결핵병원에서 그리고 7월부터 8월까지 목포 고아원에서 실습하며 어린이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당시 동생 영희, 병환이와 함께 자취를 하며 숙식을 책임졌습니다.

 

그 당시 나이 만 18, 19718월부터 1020일 출국 때까지 서울 괴테 어학원에서 3개월간 독일어를 배우면서 한국을 떠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국방부 공무원이던 첫 남편인 하인즈 담씨

  

▲  교회 간호사로 일하게 된 사연이 소개된 당시의  신문 보도  

19711020일 김포공항을 떠나 같은 날 듀셀도르프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도착한 본대학병원에서 외과와 이비인후과에 배치되어 환자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도착 후 5일 만에 근무와 동시에 독일어 강습도 시작 되었습니다. 오전엔 병동에서 수술 받은 환자들을 돌보고 오후엔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독일어 선생님인 헤르부레는 친절한 성격의 중년 남자분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마음이 슬펐지만 밤마다 꿈꾸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고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19711220일 나는 독일에 온지 두 달 뒤에 만19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침마다 대학병원 직원식당에서 빵에 버터와 마밀레이드 쨈(오렌지나 레몬 등의 껍질이 재료)을 발라 먹고 신선하고 달콤한 오렌지를 까먹으면서, 그 때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생각나 눈물을 훔쳤습니다.

 

1972년 가을쯤, 독일에 도착한지 1년 후 외과 남자 병동 근무처에서 독일 국방부 공무원이던 첫 남편인 하인즈 담씨를 만나게 되었고, 독일생활에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연수차 4주간 병동에 배치되어 왔을 때 제가 도우는 일을 담당했고 그래서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1973915일에는 본 대학병원 간호학교에 입학을 한 뒤, 3년 후에는 엑사멘’(유럽연합 국가간호사 자격증)을 받고 간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대학병원 피부과 남자병동에 둘째 수간호사로 취임했습니다.

 

197612324세의 나이로 하인즈 담씨와 결혼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딸 시모네(Simone)가 태어났습니다. 딸 시모네는 현재(20191) 41세이고 83개월짜리 아들 루푸스와 47개월짜리 우나 딸이 있습니다.

 

 

수간호사 직책, 그리고 독일 국적 취득

 

1980414일부터 516일까지 4주간은 괴팅겐에 있는 간호대학에서 수간호사 공부를 마친 후 피부과 남자병동의 수간호사 직책을 위임 받았습니다.

 

19811030일 독일국적을 취득함과 동시에 한국국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적상실 통지가 1983727일 주독대사관으로부터 날아왔습니다.

 

1983430일 초등학교(Grundschule)에 입학한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1년간 사직서를 내고 쉬는 동안 중환자와 죽어가는 환자와의 대화상담공부(호스피스 공부)를 하고, 본 대학 교육학과에서 심리학적 그룹과정 분석(Psychologische Gruppenprozesse)’을 자일러 교수(Frau Professor Sayler) 지도하에 청강생으로 공부했습니다.

 

나의 소원인 진학의 꿈을 더욱 더 펼치기 위해 근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Abendgymnasium)1984부터 1987년까지 4년 동안 다녔습니다. 독일은 고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1987619일 종강시험(Abiturprüfung Note 2,6)2,6의 점수를 받고 수료했습니다. 1점이 최우수 점수이지만 나에겐 매우 훌륭한 점수였습니다.

 

198571일부터 720일까지 3주간 영국 쉐필드어학원(Sheffield City Politechnic)에서 공부하여 영어실력을 다듬었고, 1년 후인 198682일부터 29일까지 4주간 영국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본머스에서 다시금 영어실력을 쌓았습니다. 이번엔 중급 이상의 영어를 숙달했습니다.

 

▲ 양로원 위문 공연을 마치고. 첫줄 오른쪽부터 네번째가 필자     


 

이혼의 아픔, 새로운 변신에 심혈 

 

1987101일부터 본 대학 번역학과(중국어와 한국어를 독일어로 번역)에 입학하여 1989331일까지 약 1년반 동안 대학에서 중국어와 비교종교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이혼이라는 운명이 다가 오면서 딸의 앞날을 위해 본 대학에서 하던 공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198551일부터 19881231일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 대학 번역학과에서 공부할 때까지 5년 반 동안에는 본 대학병원 외과병동 특실에서 밤 근무를 했습니다. 밤에는 일하고 아침에 나가서 강의를 들으면서 눈이 감겨와 매우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 후,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정든 본 대학병원을 뒤로하고 한 계단 올라서 교회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198931일부터 631일까지 4개월 동안 본 베누스베르크(Bonn-Venusberg) 부활교회(Auferstehungskirche)에서 일하던 동료 아델하이드(Adelheid)가 연수 차 일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내가 실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4개월의 실습기간을 마치고는 다른 교회에서 교회간호사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198971일부터 1999331일까지 거의 10년간 본에 위치하는 바트 고데스 베르크(Bonn Bad Godesberg) 지역의 임마누엘 교회에서 교회간호사로 일주일에 29시간은 구역 환자 가정간호를 하였습니다.

 

나머지 9시간은 14일 간격으로 있는 실버세대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일주일에 한번 씩 상담시간(Sprechstunde)을 실시하며 환자와 친지들을 돕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슬픔과 애도 중에 있는 여러 해 간호해 주던 환자가 돌아가신 후 친지들을 방문하거나 친지들이 교회사무실로 와서 얘기를 나누는 친족과 친지들의 동행자 역할이었습니다.

 

1989926일에 전 남편 하인즈 담 씨와 14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서로의 행복을 빌며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딸에게 미칠 상처와 아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헤어진 후 어려움을 겪으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만일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노력하겠노라고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그 후 새 남편 하트 뭍이 다가왔고 이혼 후 6년만인 199555일 근무하던 교회에서 많은 교회식구들과 친구들의 진심 어린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언니와 형부 그리고 조카 온유와 은성이가 한국에서 와서 참석해 주니 더욱 위로가 되었습니다.

 

▲ 위로와 보람을 만끽하게 한 성가대원들과 함께. 


근무한지 약 10년이 지난 후 교회 인원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교회 측 사정으로 인하여 행정이 불가능하게 되어 교회 간호사의 직을 접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1995년부터 독일에 간호보험이 실시되었고 교회간호사들의 월급을 보험회사로 부터 받게 됩니다.

 

그 결과로 간호해줘야 할 환자 수를 올려야만 했었고 건강에 미친 악영향은 막강했습니다. 허리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재활치료를 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교회간호사의 직을 접고 일자리를 구하던 순간 새로운 일자리를 찿았습니다.

 

대전진! 심신 분석치료 상담사, 기공사 자격증

 

199951일부터 심신을 다루는 치료병원 라인클리닉에서 일을 시작한 뒤 퇴직할 때까지 약 18년을 헌신했습니다. 라인클리닉은 라인 강가인 받 호네프’(Bad Honnef)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책은 새로운 과제를 숙제로 안겨주었고, 숙제를 마스터하기 위해 상담학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공부는 이 병원에서 일하는데 부족했고, 나의 자신감뿐만 아니라 병원에서의 역할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문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동료들과 함께 


 

 

 

▲ 퇴임식에서


이에
200331일부터 20051216일까지 3년 동안 상담학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로 심신 분석치료 상담사(Psychoanalytisch Systemische Beraterin)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그 공부를 끝내고도 여전히 상담간호사의 월급을 받고 일했으며, 그 사실이 불공평했고 불만족 했습니다.

 

2009323일부터 20111215일까지는 기공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한편, 근육이완치료법(PMR, Progressive Muskelrelaxation)을 공부하여 이완치료를 제공하는 등 환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라인클리닉에서 환자들의 관련 치료에 성공적으로 힘을 다한 것입니다. 특히 트라우마 환자들에게서 큰 효과를 보였습니다.

 

참조로 기공사의 역할은 기치료이자 대화치료를 보조해서 치료의 효과를 상승하게 합니다. 기공사는 기공하는 사람에게 직접 자기 효능감을 경험하게 하고, 상상력과 시각화를 사용하여 자연의 힘을 빌려오게 하는 특이한 치료방법입니다. 특히 호흡조절과 숨고르기는 사람의 안정을 도모하는 자연치료 방법입니다.

 

교회 음악캠프에서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본 평화교회무지개 합창단 봉사활동

 

봉사 생활로는 20033월부터 20191월 현재까지 본 무지개 합창단에서 활동을 해왔는데 20115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일 공식 방문 시 동포간담회에 합창단 대표로 초대받은 일은 절정 가운데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소속된 교회 본의 평화교회(Evangelische Friedenskirche Bonn)에서는 1999년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항상 기쁨을 주기에 지속하려 합니다.

 

특히 교제와 나눔 은 성가대의 효능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을 경험합니다. 해마다 있는 음악캠프 때에는 제가 배운 기공을 아침마다 제공해 줄 수 있어서 배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201323일에는 멀리서 항상 그리워서 거의 매해 한국을 찾아 뵙던 우리 어머님이 94세의 연세로 임종하심으로 오랜 세월을 애도 하였습니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 18살이었고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늘 어머니 품이 그리웠습니다.

 

살아온 동안 때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무척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고 미래의 어머니인 것을 지금 경험합니다.

 

 

▲ 환자의 치료효과를 상승하게 하는 기공 훈련!


 

소임! 독일과 한국의 가교역할 

 

2014326일부터 충남의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치료자 팀이 라인클리닉에 집중운동요법(KBT, Konzentrative Bewegungs Therapie)을 공부하러 왔으며 통역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고국인 한국을 위하여 일하게 된 셈이 됩니다.

 

충남과의 인연은 이렇습니다. 제가 노래하는 무지개 앙상블(ensemble)6년간 반주자로 일하던 박은혜님이 음악치료자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저의 소개로 제가 일하던 라인 클리닉 (Rhein-Klinik) 음악 치료를 담당하신 프랭크 그루타스(Dr Frank Grootas) 박사님의 지도로 음악치료공부 실습을 이곳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충남 광역 정신건강 증진센타에서 음악치료자로 근무하시고 계십니다.

 

퇴직 1년전인 20159월부터 만돌린 레슨을 약 6개월간 박영달 선생님으로부터 받았고, 그 후론 소도시인 헤네프(Henne) 베스터하우젠(Westerhausen) 마을에서 만돌린 음악학교를 운영하시는 림바흐(Limbach) 여사님 지도하에 계속 만돌린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 무지개 앙상블 성탄 음악회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만돌린 협회 소속의 지글러 클럽에서 함께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우리 무지개 앙상블 만돌린팀 네 사람과 함께 나가고 있습니다.

 

손자돌보는 것은 힘들지만, 즐거움을 가져다 주며 할머니로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201610월자로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45년 불철주야 동분서주 사역이 막을 내렸을 때는 벌써 64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라인 클리닉(Rhein-Klinik)에선 거대한 퇴임식을 해 주었고, 제가 일하던 병동의 환자들이 거의 14일 간 축제를 준비해서 감동적인 축제를 열어 주었습니다. 노래 가사도 짓고 지은 가사에 합창도 했으며 케이크도 만들고 바비큐까지 준비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따스하게 남아 있습니다.

 

퇴직 후 약 6개월이 지나서 근무처에서 소식이 왔는데, 다시 와서 환자들과 기공을 계속해 줄 수 있냐는 요청에 기꺼이 응하게 되었습니다. 퇴직 후 일 년이 지난 20179월부터 일주일에 월요일마다 한 번씩 파트 타임으로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보수까지 있어서 작은 연금에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제게는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일하는 시모네 딸을 돕기 위해 14일 간격으로 쾰른시 소재 델브뤽(Köln-Dellbrück)에 가서 손자 루푸스(Lupus)와 손녀 우나(Una)를 돌봐주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이며 할머니로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201919일 독일 본에서 늘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국의 독자들에게 임정희 올림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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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9 [18:06]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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