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소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 전도여행 동행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제자보다 앞선 부활 첫목격자
가톨릭 교황은 오랫동안 부도덕한 창녀로 왜곡 묘사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여제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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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당시 흔한 이름으로,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여제자이다. 고향이 막달라(Magdalene)여서 막달라 마리아로 불린다. 막달라는 갈릴리 북서쪽에 위치한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누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고 기록한다. 일곱 귀신 들린 그녀는 분명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심각한 상태였을 것이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막달라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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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 번째로 소개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복음전파 활동 기간 중 둘째 해에 관한 기록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누가복음 8:1-3)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담대하게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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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앞으로 닥칠 환난과 핍박을 예상하며 두려워하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한복음 19:25)
더욱이 무덤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넣음을 보았고 끝까지 그 무덤을 지켜보았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태복음 27:61)
▲ 막달라 마리아는 더욱이 무덤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넣음을 보았고 끝까지 그 무덤을 지켜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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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사람은 수제자 베드로나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까지 전하게 되었다.(요한복음 20:1-19)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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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하게 이미지를 변형시킨 교황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크게 실수하는 부분 중 하나는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는 1889년에 Edwin Pond Parker가 작시, 작곡한 찬송가 346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심하게 왜곡시킨 사람이 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Magnus, AD540~604)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 성경은 너무나 비싸고 귀한 책이었다. 교회나 수도원에만 보관되었던 성경은 사제와 학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볼 수 없는 일빈인들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심하게 왜곡하였다. 그는 베다니 마리아와 갈릴리 나인 성 근처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누가복음 7:37)과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마가복음 26:7)을 혼합하여 근거가 전혀 없는 막달라 마리아 이미지를 구축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복음의 죄 많은 여인과 마가복음의 베다니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동일인으로 보았으며, 창녀로 해석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들린 것은 일곱 가지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그중에 가장 큰 죄가 창녀로서 성적으로 문란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들림을 음란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근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음란하다고 해석한 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지독한 편견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이후 오랫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위대한 여성 지도자요,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는 졸지에 창녀가 되었다. 마리아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창녀로서 욕망의 삶을 살던 죄 많은 여인으로 적극 부각된 것이다.
근대에 와서 막달라 마리아가 베다니의 향유를 부은 여인과 동일인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세속문화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과 세속적으로 연결시켜 기독교를 조롱하는 글과 영화들이 끊임없이 유포되고 있다.
▲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믿음의 여인이다. 그녀는 용감하고 강인한 여성 지도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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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창녀인 적도 없었고, 일곱 가지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녀는 인생 전부를 걸고 주님을 따랐으며 생명 바쳐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모두가 불안에 떨며 두려워 숨을 때 과감하게 주님 무덤을 찾아갔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믿음의 여인이다. 그녀는 용감하고 강인한 여성 지도자였다.
성경학자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계기로 초대 교회 여성 지도자로 떠올랐다고 주장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하는 것을 보아 이러한 추측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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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