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 모든시대 유대인들에게 삶의 중심
최초는 솔로몬 성전이고, 마지막은 성전 헤롯성전
이젠 제3의성전 건립 박차 그러나 큰 복병 도사려
그자리에 이슬람 오마르사원, 건축 강행땐 전면전
▲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삶의 중심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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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임재가 머무는 곳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삶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고 강력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이 현존 하시는 곳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 제사로 하느님께 다가가며 만나며, 하느님은 용서와 계시로써 기도에 응답하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역대하 2:5-6)
또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역대하 7:16)
성경에 성전(성막)건축에 관한 기사는 구약에서 네 번 나온다. 모세의 성막 (주전 15세기), 솔로몬의 성전(주전 10세기), 스룹바벨의 성전(주전 6세기), 그리고 헤롯성전(주전후 1세기) 등이 그것이다. 헤롯성전을 제외하고 모든 성전건축에 상세한 기술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성막(Tabernacle)의 발전 형태로서 하나님께서 백성 안에 거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처소였다.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성막이 아닌 성전(Temple)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에 있는 ‘성막’(Tabernacle)을 보여 주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생활에 필요한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지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애굽기 25:2)
그러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이때를 위하여 재물을 주신 줄로 믿고 앞 다투어 하나님 앞에 재물을 너무 많이 가져와서 오히려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애굽기 36:5)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에 걸쳐서 세워졌다. 솔로몬 성전(왕상 6장), 스룹바벨 성전(에스라 6장), 그리고 신약 시대의 헤롯 성전(BC20-AD63)이 바로 그것이었다.
▲ 헤롯은 성전의 본전의 크기는 그대로 하여, 솔로몬 성전의 복원으로서 세워진 포로귀환 후의 성전 그대로하고, 또 그 전반적인 것도 바꾸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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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 성전에서 헤롯성전까지
▽ 제1성전 ‘솔로몬 성전’
통일 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Hebron)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이었지만 부족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흩어진 12지파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법궤’(Ark of Covenant)가 없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소망했다. 뜻은 좋았지만 법궤를 옮겨오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법궤를 옮길 때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이 직접 메어 옮겨야 했다.(민수기 4:15)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처럼 소가 끄는 수레로 이동하다가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머물게 된다. 오벧에돔의 집에 축복이 임하자, 다윗은 다시 법궤를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드디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자 다윗은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역대상 13장)
기실, 솔로몬의 성전은 사실상 아버지 다윗이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윗이 성전을 짓기 원했지만 전쟁에서 너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다윗은 성전건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맡겼다. 솔로몬 성전의 총공사기간 7년 6개월 만인 BC 959년에 예루살렘의 모리아산(Mount Moriah) 위에 성전이 준공되었다.(열왕기상 6장)
주전 959년에 완공된 솔로몬 성전은 유다가 멸망하는 주전 586년에 파괴되었다. 성전이 준공된 지 373년 만인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3차 침공 때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훼파되었고, 성전의 금, 은, 놋 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
페르시아 아카이메니아 왕조의 창시자이자 바빌로니아를 무너트린 고레스 2세는 기원전 538년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에스라 1장) 그리고 이 제2성전 시대에 예식은 의식화 되고 희생제사가 중시되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잠시 평온을 되찾게 된다.(느헤미아 3장)
이스라엘 역사상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함락된 후 BC 516년 건축한 것으로서 옛 성전에 비해 크게 초라했고, 포로 귀환 이후 바사(persia) 식민지 상태에서 건축한 것으로서 학개서에도 언급되었듯이 그 과정에 우여 곡절이 많았다.(학개 1:1-6)
▽ 마지막 헤롯성전(Herods Temple)
이방인인 이두매(Idumea) 출신인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 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 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공사는 AD 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헤롯은 성전의 본전의 크기는 그대로 하여, 솔로몬 성전의 복원으로서 세워진 포로귀환 후의 성전 그대로하고, 또 그 전반적인 것도 바꾸지 않았다.
아무튼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완공된지 불과 수년 후에 AD 70년 영원히 함락되고 만다.
헤롯시대 후는, 성전의 거의 외국 지배하에 놓여졌다. 로마 총독의 통치하에 있어서 반대 행동 중 하나는 로마황제를 위해 날마다 드려지는 희생제물의 중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행동은 대반란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로마군은 열심당(셀롯당)의 거점으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마침내 성전을 점령하고, 기원 70년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
그래도 성전뜰 남동쪽의 거대한 통곡의 벽은 오늘도 볼 수가 있어서, 커다란 석재를 쓴 하부구조는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한편, 예수님은 이 같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무너뜨리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 처소의 상징에 불과한 헤롯 건물 자체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체이신 당신을 죽이면 삼 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2:19-21)
▲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이 파괴될 때 유일하게 파괴를 면하고 남아있는 흔적이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서쪽 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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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성전의 흔적 ‘통곡의 벽’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이 파괴될 때 유일하게 파괴를 면하고 남아있는 흔적이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서쪽 벽이다.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성전은 완공된 지 불과 수 년 후인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헤쳐버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헤롯 당시 성전의 바깥 벽 중 일부 약 450m 정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금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일 년에 하루 성전파괴일인 4월 9일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의 벽으로의 접근을 허락했다.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 왕이 건설한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4월 9일에 파괴되었고, 재건된 헤롯 성전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된 날도 4월 9일이었다.
4월 9일 예루살렘의 서쪽 벽에 모인 유대인들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자랑인 성전은 불타 버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그들은 메시야가 속히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눈물을 흘렸다.
통곡의 벽에는 돌 틈새마다 유대인들의 기원을 담은 기도문 쪽지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하고 있다. 쪽지들은 너무나 많아서 바닥에도 수북이쌓여 있다.
▲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그 자리엔 서기 691년에 세워진 이슬람교의 황금돔(Golden Dome) 사원이라고 불리는 오마르 사원(오른쪽)과 알 아크사(Al Aksa-왼쪽) 사원이 우뚝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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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리엔 ‘이슬람 오마르사원’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는 AD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뒤, 그 자리엔 서기 691년에 세워진 이슬람교의 황금돔(Golden Dome) 사원이라고 불리는 오마르 사원과 알 아크사(Al-Aksa) 사원이 우뚝 자리 잡고 있다.
638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했던 칼리프 오마르 장군은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하면서 현재 남북으로 500m, 동서 300m 넓이의 성전산 위에 황금돔(Golden Dome) 사원이라고 불리는 오마르 사원과 알 아크사 사원을 세웠다.
성전산에는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과 ‘통곡의 벽’이 있으며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성지이다. 팔레스타인이나 회교 국가들은 성전산을 이슬람교의 3대 성지로 여기고 있다.
▲ 1967년 발생했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모세 다이얀(Moshe Dayan) 장군이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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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발생했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모세 다이얀(Moshe Dayan) 장군이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이스라엘 깃발을 황금돔 사원에 꽂는 승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아직까지 유대인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원은 이슬람의 제 3의 성지로 알려져 있기에, 만일 이스라엘이 만일 제3성전을 짓기 위해 이슬람 사원을 허문다면 이스라엘은 모든 이슬람 국가들의 저항에 직면해야 할 것임을 이스라엘도 잘 알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 정부가 제3 성전 건립의사를 공개적으로 명시하거나 추진할 경우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순교자적 자세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곧 이슬람 세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들은 만일 이스라엘이 제3 성전 건립을 강행할 경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이란 국지적 대립이 아니라 ‘이스라엘 대 전 세계 이슬람국가’의 대결로 변해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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