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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3.04 [20:20]
<연재소설> ‘작가 朴又木’ 혈맥(血脈) ‘가야의 샛별’(4회)
 
작가 朴又木
▲  작가 朴又木  

주막으로 들어섰을 때 성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상시처럼 물을 긷고 있었다.

서달이 물지게를 내려놓는 성광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절했다.

이렇게 또 뵈옵게 되었습니다.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니, 노인장은 관룡 산에서 만난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천우신조로 은인을 서라벌에서 다시 뵈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나 역시 뜻밖이라 반갑소이다. 그래 그 댁 마님께서는 무량하십니까?”

은인을 만난 것을 아뢰었더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소인더러 당장 모셔오라 하셔서 이렇게 달려왔습지요.”

마침 물도 다 길었으니 그럽시다.”

 

그가 서달을 따라가 당도한 곳은 신라 태동의 성지인 서남 산 서쪽자락이었다. 거긴 왕족이나 귀족 출신인 진골(眞骨)들만 모여 사는 곳으로 집들은 고대광실이었다.

그는 하인을 따라 아담한 정원이 내다보이는 누마루를 앉힌 사랑방으로 갔다. 그가 잠시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면서 하녀를 거느린 안주인이 들어섰다. 관룡 산에서 보았을 때와 너무도 다르게 훨씬 젊었으며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은인을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뜻밖의 해후입니다.”

좌정하세요.”

그가 앉기를 기다렸다 주인이 큰절을 했다.

보명이라 하옵니다.”

저는 가야에서 온 성광이라고 합니다.”

 

그가 맞절을 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신분을 밝혔다.

시립한 하녀에게 눈짓을 보내자 이내 술상을 들여왔다. 상차림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보명이 손수 은잔에다 술을 따랐다.

 

사랑(舍廊 바깥주인)이 계시지 않아서 불편하시더라도 제가 대접을 하겠습니다. 드시지요.”

가주도 부재중이신 방에서 이렇게 술상을 받아서 결례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타계하셨으니 제가 주인이지요. 가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신라에서는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니 심려 놓으시고 편안히 드십시오.”

 

그럼 오랜만에 대탁(大卓)을 마주하고 앉았으니 달아났던 식욕을 불러들여 포식을 하겠습니다.”

그가 석 잔 술을 마실 때까지 보명이 술을 따랐다. 넉 잔째에 그가 술병을 들어 그미의 잔을 채웠다.

앞서 석 잔의 술은 손님에 대한 예우로 주신 걸로 알고 마셨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독작의 쓴 술이 아니라 대작의 흥취를 섞어 마시고 싶습니다.”

 

저야말로 실로 오래 만에 사랑에 내갈 술상을 차리며 즐거워했답니다. 더구나 천지신명의 인도로 이렇게 은인과 해후한다는 게 정말 꿈만 같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 잔을 비우겠습니다.”

대작을 시작으로 저녁 이내를 밀어내고 내린 어둑발이 이슥해지도록 저들은 마치 스스럼없는 오누이처럼 정담을 나눴다.

 

대작을 하면서 주객은 그간에 풀 수 없었던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었다.

보명부인은 성광이 비화가야의 서 왕자로 삼국을 주유하는 길에 조상의 능원이 있는 목마산성에 들렀고 서라벌에는 태자비로 출가한 가락국 공주의 잉신으로 온 동생을 만나러 들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그는 보명부인이 이태 전에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에 출전했다가 남편이 전사해서 청상이 되었다는 사실과 보명은 왕족 출신이고 남편은 귀족 출신으로 남편이 두 번째 최고 관등인 아찬까지 올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명부인의 간곡한 권유로 그가 사랑에 머물게 되었다. 보명은 은인에게 보답한다면서 안주인으로서 지성을 다해 수발을 들었다. 그미는 실은 사랑에 머무는 손님이 미혼의 가야 왕자의 신분임을 안 날부터 신라 여인답게 어떻게 해서든지 성광을 계속 붙들어 놓고 사랑의 새 주인으로 삼고 싶었다.

 

보명은 활달한 신라 여인에다 고독한 규방에서 피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청상이었다. 잘생긴 헌헌장부에다 출중한 무예까지 갖춘 미혼 왕자가 그것도 아주 묘한 인연으로 사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그저 은인으로만 대하며 지내기에는 낮은 너무 안타깝고 밤은 너무나도 외롭게 길었다.

 

보명의 사랑 출입이 잦아졌고 술시중 시간이 길어졌다. 피가 뜨겁기로 치면 그 또한 그미만 못잖은 청년이라 잦은 만남으로 나날이 그미의 지성에 취하고 미색에 취하고 체취에 취해갔다.

 

어느 날 밤 농염한 미소와 애소하는 눈길과 유혹적인 교태가 정염의 불씨를 살렸을 때 어느 순간에 갑자기 큰불로 확 번져 간절한 욕망을 맹렬한 기세로 불살랐다.

 

그들은 매일같이 허기진 사람처럼 새벽녘까지 몸을 섞으며 환희의 잔에 쾌락을 철철 넘치게 담아 마셨다. 낮에는 요조한 안주인이었다가 밤이면 환혹적인 꽃으로 피어나는 그미의 변신은 그의 영혼까지를 사로잡았다.

 

뜨거운 사랑을 탐닉하여 보낸 날이 그러구러 보름이나 지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그가 보명부인을 채근해서 궁으로 보냈다.

궁에서 알아온 소식은 실망스러웠다. 그의 아우 성도는 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제와의 전투에 출전한 태자를 따라 궁을 떠난 지가 꽤 오래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아우를 통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옛 정인 야연희 공주를 먼빛으로라도 보고 서라벌을 떠나려던 기대도 무너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뜨내기 같은 신세를 잊고 머물지도 못할 서라벌 여인에게 무책임하게도 허무한 무지개를 띄워주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떠날 몸, 백제를 향한 노정을 서둘러야 하겠다고 작심했다.

그날 저녁 보명부인은 더욱 아름다웠지만 떠날 결심을 재촉한 그는 침울했다. 서너 잔 술을 권한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와 앙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안색이 어두운 까닭을 물었다. 그가 떠나야함을 설명했다. 그미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하나 이별이 서러워 눈물만 흘렸다.

 

그가 언젠가 성가할 준비가 되면 득달같이 달려와 그미를 데려다 아내로 맞을 것이라 약속하며 길 떠날 채비를 부탁했다.

 

그가 떠나는 날 보명이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는 성광을 인도해 사당으로 가 둘이 혼례식을 미뤘을 뿐 부부가 되었음을 고했다. 그리고 후일을 기약해 반조각낸 부절을 정표로 나눠 가졌다.

그미가 쏟아지려는 눈물을 감춘 채 의연하게 그를 전송했다.

 

그가 서라벌을 벗어나 단석산 북쪽 산자락 산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해가 설핏하여 어둑한 이내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등짐장수로 보이는 차림을 한 장정 다섯이 나타나 길을 막고 나섰다. 그들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 괴한들은 불문곡직하고 살기를 실어 공격했다.

 

이런 불한당을 보았나. 웬 놈들인데 날 죽이려드는가.”

그는 찔러드는 칼날을 피하면서 괴한들을 살폈다. 입을 떼지 않는 살수들은 그를 노리는 게 맞았다. 그는 살수들이 자신을 노릴 이유나 목적이 무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신라 땅을 무사히 벗어나려면 저런 무리에게 두 번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혼을 내주고 한 살수는 살려 그 배후를 알아낸 다음 경고 차원에서 살려 보내기로 결심했다.

 

결심이 서자 그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 나오며 행동이 비호처럼 민첩해졌다,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나 싶더니 뻗어나간 발이 휙 하니 바람을 가르고 찌르는 서슬에 살수 하나가 억 하고 명치가 막히는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졌다. 살수들이 멈칫 물러서는 듯싶더니 기합소리를 내며 빙글 에워싸고 조여들며 공격의 틈을 노렸다.

 

그는 이 싸움은 시간을 끌어 살의를 죽일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빨리 결판을 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단검을 꺼냈다. 갑자기 살기가 곤두섰다. 그리고 그가 일갈했다.

너희들을 살려 보내도록 해 보겠다만 내 실력이 부족해 목숨을 끊더라도 원망치 마라.”

 

동시에 몸을 앞으로 날린 그의 발이 한 살수의 복장을 가격, 살수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상체가 허물어져 내릴 때 그의 단검이 칼을 쥔 오른 쪽 팔 쇄골부위를 찌르고 물러나 제자리로 섰다. 그 동작이 가히 순간에 일어나 매듭진 일식의 공격이라 노련한 살수조차 무엇에 홀린 듯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살수들은 그가 죽일 수도 있는데 일부러 칼만 쓰지 못하게 상처만 입혔다는 걸 알아차렸다.

 

살수들이 눈을 맞추나 싶더니 돌아서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부상을 입은 살수가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그가 살수의 오금을 걷어찼다. 살수가 주저앉자 그가 발로 등짝을 눌러 꼼짝 못하게 제압한 후 물었다.

살고 싶으면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답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을 보낸 자가 누구냐? ”

바로 들은 건 아닌데 어느 왕실의 청상을 욕보인 자를 그 오라비가 살아 떠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들었수,”

 

그의 가슴에 보명이 떠올랐다. 그미의 오라버니가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그대가 서툰 솜씨로 곁다리 살수로 가담한 게 그대를 살렸다. 그대가 허점을 보여 그대를 공격했으나 죽일 생각이 없는지라 깊이 찌르지 않았다. 제명대로 살고 싶으면 다시는 살수한테 빌붙지 마라. 가라!”

 

살수가 떠나자 보명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몰려왔다.

보명과 헤어지기 전날 밤 그미가 우려 속에 담아 신신당부하던 말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중신으로 일선 방위사령관인 그미의 오라비는 누이가 서라벌에 허다한 번듯한 귀족가문의 자제 중에서 재혼 상대를 고르지 않고 방랑자 신세로 떠도는 쇠락하는 가야 왕자를 마치 밀부(密夫)처럼 품에 안은 처신을 수치로 여겨 처단하려 한 것이다.


원본 기사 보기:해피!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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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6 [23:26]  최종편집: ⓒ womansen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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