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화 이야기를 쓰는 변명
현대사회에서 영화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예술의 한 장르로 치부하기엔 비중이 너무나 커져 버렸다. 접근성이 좋아 이제 영화관까지 가지 않아도 채널만 돌리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다. 경제 논리인 수요와 공급의 정글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플랫폼에 올리면 수요는 당연히 따라온다.
그뿐인가. 영화는 온갖 예술 분야와 기술, 산업을 모두 수용하는 잡식성이 강한 분야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 그 안에는 문학, 철학, 역사, 패션, 미술, 음악, 디지털 기술까지 총망라해 뒤섞어서 하나의 피륙으로 짜서 완성시킨 결과물과 다르지 않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도 가장 영화답게 만드는 다른 요소를 간과할 수 없어 허탈해지곤 한다. 종종 인기를 얻은 영화의 스토리가 거꾸로 문학작품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대열에 한 번쯤 발을 담그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임을 절감한다.
그럼 어쩌랴! 우리도 영화에서 배우면 되지 않을까. 문학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이런저런 벽을 쌓지 말고 음악에도 영향을 주고,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하는, 그리하여 영화라는 거대한 블랙홀에도 무시할 수 없는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문학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사유의 바다에 일렁이는 작은 물결을 응시해 보면서, 흡수한 모든 것들을 시간 속에서 되새김질하면서 나의, 우리의 문학세계가 더 깊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믿어본다. 작은 믿음의 단초를 풀어내 보이면서.
1. 결투(duel)-대결의 전장에 서서
스티븐 킹의 소설은 확실히 미국적인 뉘앙스를 지닌 것 같다. 소설의 배경과 묘사가 이질적이다.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읽고 소화해 내기가 솔직히 버거웠다. 그래도 호러나 추리 같은 장르소설을 모른다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책꽂이에 그의 작품집을 나란히 세워두게 되었다.
유행이 패션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추앙해 마지않는 리처드 매시슨(1926-2013)을 몰랐다는 점에서 나는 역시 얄팍한 독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었다.
2021년 현대문학 7월호에 3편의 리처드 매시슨의 단편소설을 만났다. 그 중 한 작품인 『결투』를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문장을 이어 붙여 인물을 배경 속에 녹아들게 만들며 서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작가는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고, 끌고 가면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소설의 장면과 내용을 그려주고 보여주었다.
긴장을 놓칠 수 없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매시슨의 재능은 정말 빼어났다. 미사여구나 과장이 없어도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전해졌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시시한 소재의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맨은 미국의 평범한 소시민이자 샐러리맨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거대한 트레일러트럭을 추월하면서 신경 다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생각했다가 비상식적인 트럭 운전사의 끈질긴 위협과 진로방해로 생명을 위협을 받는다. 가고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모하비 사막의 황량한 도로 위에서 점점 살벌해가는 두 차량의 대결 이야기다.
경찰도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승용차와 대형 트레일러와의 대결은 주인공에게 확실히 불리하다. 결국 주인공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트럭을 유인해 절벽 아래로 추락시키면서 끝나는 소설이다. (우리나라 도로 사정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왠지 같은 내용을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소설의 1/3이 지난 후였다. 20여 년 전, tv에서 본 영화의 원작임을 안 순간 기억을 재생해낸 스스로가 기특하기까지 했다. 반가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원작 소설을 읽게 되었듯이 그때 영화를 보며 느낀 생각이 기억의 한 모퉁이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말의 명화였던가, 브라운관 앞에서 기대하지 않고 본 영화였다. 줄거리의 별 것 아닌 사소함이 충격적이었다.
이렇게도, 이런 소재만으로도 영화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함, 다른 영화와의 차별화된 시각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한 러브신도 총격전도 없었다.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지도 않고 대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보게 만드는 영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각인하게 만들었던 영화였다. 그리고 고스란히 기억 속에 묻어 놓았던 그 느낌이 원작을 읽으면서 살아난 것이다.
딸이 퇴근했을 때 소설 원작과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자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라고. 그 전에 자잘한 작품이 있었지만 첫 데뷔작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아무리 예술영화와 거리가 멀다고 스티븐 스필버그를 폄하해도 그의 대중적인 감각은 독보적이지 않은가.
자칫 지루할 것 같은 소재의 짧은 원작소설을 단 10일 만에 초저예산으로 촬영했다면 낭중지추, 천재적인 재능임을 부인할 수 없다. 평범한 나의 무의식까지 치고 들어와 저장해 놓고 나간 것을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스필버그 감독은 대가로 성공한 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가끔 이 영화를 본다고 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 얼핏 복잡해 보이는 내용도 단순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시학과도 일맥상통하는 무엇이 존재했다. 바늘이 옷감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은 뾰족함이다.
뭉툭하면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다. 돋보기의 흑점처럼 한곳에 모아져야 선명한 주제로 독자든 시청자든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다짐하지만 언제나 산만해지고 만다. 나아가야할 글의 방향을 잡고 나와의 대결, 결투가 치열할수록 발전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도 옆길로 샌 것 같다.
『duel』은 결투 혹은 대결로 해석한다. 영화 내용에서만 본다면 트럭 운전사의 일방적인 살해 위협이다. 그를 방어하기 위해 대응하는 주인공은 그 결투를 치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출장지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짜내어 그 대결을 받아들이는 결투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트럭이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 결투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의 나머지 인생 항로에서 기다리는 것 모두가 장밋빛 카펫일까.
직장에서는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대결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믿음과 사랑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지루한 일상을 극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슈퍼복권에 당첨될 수도 있지만 마켓에서 총을 든 강도와 인질극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어차피 불확실하다.
평온한 출장길이 엄청난 결투의 현장이 되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우리 삶의 여정도 지루하고 힘겨운 대결의 연속이 아닐까. 나를 위협하는 상대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세상의 악(惡)일 수도 있다. 길고 긴 싸움이 이어지는 길, 누구도 대신 나서주지 못하므로 스스로를 믿고 완주해가는 수밖에. 우리 모두 싫든 좋든 대결의 전장에 서 있다.
2.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빛나는 상상력을 상상하다
독재자들이나 최고 위정자들이 암살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자신과 닮은 대역을 쓴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듣는다. 『광해』도 그런 맥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내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한 듯하다. 실록에서 사라진 15일간의 기록을 주목하며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은 팩션 사극이다.
광해군은 역사에서 평가의 진폭이 크게 엇갈리는 왕이었다. 실리외교에 뛰어나고 대동법을 실시한 영명한 군주라는 평가와 동시에 성리학적인 규범에 얽매인 조선조의 시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평가까지 양면적이다. 아니 임진왜란 전후의 지난한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그가 보인 얼굴은 다면적인 수많은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 가운데 한 지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천착해 나가는 작업이다. 군주로서의 광포한 카리스마는 그만큼 내면의 공포를 담고 있기에 ‘대역’을 내세우는 설정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영화 『관상』에서의 주인공 내경이 광해와 꼭 닮은 외모의 광대 하선을 본다면 무어라 할까. 예리한 관상가의 눈으로 두 사람의 차이를 알아낼 수 있을까. 외모는 같아도 살아온 환경이 달라 분위기와 태도의 차이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가짜 왕은 늘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고 도승지인 허균과 상선의 교육을 받는다. 그는 최고 지존인 왕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불편함과 칼날 같은 권력의 서슬에 베일까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주위를 살피고 백성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와 강단을 선보인다.
내가 한 일은 나의 일부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고 한다. 그 평범한 진리에 광대 하선이 행한 짧은 치적은 모두가 그를 온전하게 자신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과보로 답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영화 광해를 본 주말, 대전에서 남편과 영화 007의 후속편을 보았다. 푸른 눈을 가진 멋진 체격의 영국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영화였다. 뛰고 달리고 부수고 총을 쏘는 액션에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를 퍼부은 대작이었다. 하지만 왠지 싱거웠다. 뻔한 줄거리와 액션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한국의 류승룡 배우가 훨씬 진중하고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자신이 데려와 대역을 맡긴 가짜 왕이 배를 타고 떠날 때 강 건너편에서 군주에 대한 예를 다해 배웅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영화가 나온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이 등장한 것은 『광해』를 비롯한 우리 영화들에서 이미 예견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균은 바로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도 서얼 출신이었다. 애초에 허균에게는 시대적인 배경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신분의 차이보다 능력과 학식과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천한 광대였지만 진정한 왕의 덕목을 갖춘 인품에 점점 끌리고 마침내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음직하다. 가까이 모셨던 상선이 그러했고 경호를 맡은 어영대장과 독이 든 죽을 대신 먹고 세상을 떠난 어린 나인도 한마음으로 흠모의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광대 하선의 궁궐 적응기는 코믹한 요소를 가미한 양념일 뿐 백성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영화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광해』의 클라이맥스, 끝부분으로 치달으면 핏줄이나 신분에 따라 정해진 진짜와 가짜 왕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무엇에 대해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일까. 백성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무능한 군주라면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가짜나 다름없다. 생각을 돌려 나 자신에게 집중해보면 진짜 나의 정체성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진짜 나,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어쩌면 어떤 것도 진짜 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만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 투영된 나의 생각들, 공감과 자극을 찾아 나서는 일도 참 나를 만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소재는 끝없이 리메이크되기 마련이다. 광해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하였다. 그 중 가짜 왕 광대 하선이 왕비와 궁궐 밖 구경을 하며 건넨 말이 인상적이었다.
해가 갈수록 점점 꽃이 좋아지고 감성적이 되는 나이 탓일까. 거창하고 입에 발린 말보다 소박한 약속을 담은 하선의 말에 진하게 감동하고 있었다. 내가 주인공인 중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잊을세라 노트에 적어 두었다. 이런 내가 진짜 나일까 궁금해 하면서.
봄에는 들로 꽃구경을 갑시다
여름에는 함께 소나기를 맞고
가을에는 개암나무 열매를 주우러 산으로 가도 좋겠소
돌아오는 겨울에는 어여쁜 눈사람을 만들어 드리리다.
3. 노트북- 변화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역경 즉 주역의 핵심은 변화에 있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도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사시사철의 변화도 우주 만물의 운행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공(空)사상도 고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할 때도 ‘사랑은 변하는 거야’라고 한다. 아무리 뜨겁게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시효는 얼마가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예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점점 해석이 분분하고 난해한 영화는 멀리하게 된다. 담백하고 따뜻한 감성을 살리는 로맨틱한 영화를 찾는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노트북』을 만난 것 역시 내게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대한 관점을 긍정적으로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노트북의 내용은 요양병원에서 기거하는 치매환자인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매일 찾아와서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기록한 책을 읽어주면서 시작한다.
아직도 우아한 모습의 할머니는 남편인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긴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아주 잠깐 할머니의 기억이 돌아와서 사랑했던 남편을 알아보고 포옹하지만 몇 분 후 당신은 누구냐며 소리치며 외면한다.
노아와 앨리는 17세부터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의 차이로 헤어지게 된다. 앨리의 집에서 가난한 노아를 받아들이지 않아서였다. 앨리는 대학에 진학하고 노아는 고향에서 예전에 앨리와 만났던 추억의 장소를, 폐허나 다름없던 집을 수리해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앨리는 노아를 다시 찾게 되고 둘의 사랑은 맺어진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지만 노년에 찾아온 앨리의 치매와 노아의 건강악화로 힘들어진다. 자식들이 자신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애쓰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집으로 모시려고 해도 노아는 단연코 거절한다.
사랑하는 앨리가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앨리는 자신의 병실을 찾은 노아를 알아보고 좁은 침대에서 손을 잡고 행복한 감사인사를 나누며 함께 세상을 떠난다. 절로 숙연해지는 가슴 먹먹한 결말이었다.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의 가치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경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천장사 암자에서 수행할 때의 일화이다. 스님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주위의 신도들이 법문을 들으려 법당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경허 스님은 법문은 하지 않고 주장자를 내려치고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신도들 중 여인들은 낯을 붉히며 뛰쳐나가고 스님의 어머님도 “우리 스님이 미쳤다”며 법당을 나갔다. 어수선한 법당을 수습한 후 스님은 법문을 시작했다. “내가 어린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시고 벌거벗은 몸을 씻기고 어루만지며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하셨지요.
하지만 어머니도 내가 장성하자 내 벗은 몸을 보시기가 불편하고 흉하다고 여기십니다. 가장 사랑하는 모자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바뀌는데 부부 사이, 친구 사이는 오죽하겠습니까?” 라며 모든 인간관계나 자연의 이치도 바뀌고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설파하였다. 사랑의 감정을 비롯하여 모든 것은 바뀌고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감정이 식어가는 변화만을 주로 언급하는 것일까. 나는 변화의 방향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쉽다. 처음에는 서로 데면데면하던 사이도 점점 친밀해지고 사랑이 깊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의 조부모님은 손녀 사랑에는 일심동체로 합심하셨지만 두 분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세가 드시면서 점점 돈독해지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많이 배려하고 아끼셨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로 정열적으로 사랑하다가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고 잠시 헤어지기도 했다가 다시 서로의 내면 깊이 이해와 사랑이 견고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랑은 일상의 디테일에서 출발하고 끝을 맺어가는 것이다. 끝없이 몰려왔다가 물러가는 파도처럼 편안한 무심함과 정열 사이를 오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닐까. 서로에 대한 믿음과 관심, 배려라는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그 집합체의 성장이 바로 사랑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영화 노트북의 주인공들처럼.
◨ 사공정숙 프로필
계간 『문파』 주간
1998년 『예술세계』 수필 등단
2005년 『문학시대』 시 등단.
(저서) 시집 『푸른 장미』
수필집 『꿈을 잇는 조각보』
산문집 『노매실의 초가집』
clean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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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선데이